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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일본, 개성과 한양으로 가는 길목을 차지한 주인공은(상)晴境(청경) 金善喆(김선철)

대부도가 속했던 남양부 남양만 일대는 신라시대 이래 서해안 지역의 교통·군사적 요충지였다. 화성시 서신면의 당성진(唐城鎭), 송산면의 마산포(馬山浦)와 화량진(花梁鎭)은 한·중·일을 오가는 길목의 해로(海路)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조선말 이전까지 마산포는 한양으로 가는 가장 큰 포구였다. 마산포 바로 앞에 대부도와 어도(魚島)가 있어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파도를 막을 수 있었고, 다른 곳보다 수심이 깊어 유리한 자연환경을 갖추고 있었다. 신라시대에 중국과의 교역로로 활용되었고, 조선시대는 청나라 배들이 드나 들었다. 시화호 간척 전까지 대부도 사람들이 사강 시장이나 육지로 나가는 관문이었다.
해로를 통하여 한·중·일을 오가거나, 삼국시대는 경주(慶州), 고려시대는 개경(開京), 조선시대는 한양(漢陽)의 왕을 만나거나 중요한 일을 하려면 길목에 있는 당성진(唐城鎭)과 화량진(花梁鎭), 마산포(馬山浦) 앞의 대부도 주변 해로(海路)를 반드시 지나야 했다.
조선말 이전에 배들은 안전한 항해를 위해 육지와 가까운 근해을 이용하였고, 해풍(海風)과 조류(潮流)를 이용하지 않으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없었다. 특히 대부도와 풍도 주변 해역은 조석간만(潮汐干滿)의 차와 조류(潮流)의 변화가 너무 심하여 물길과 지형을 잘 아는 섬사람을 승선시켜 도움을 받았다.
일본과 중국을 오가는 해로는 네 개 코스가 있었다. 코스⓵은 북방항로로 가장 안전해서 오랫동안 이용한 길이었다. 산둥반도의 등주-발해만-대련-의주-대동강-옹진-마산포까지 이 항로를 이용하다가 풍도-안흥만-군산-목포-거제도-대마도까지 서남항로를 이용했다.
당나라 가탐(賈耽)이 저술한 ‘도리기(道里記)’에 등주를 출발하여 백령도-강화도-덕적도를 거쳐 당은포(마산포)에 이른다. 여기서 육로로 700리 길을 가서 신라의 수도 경주에 도달한다. 대부도 바다는 신라의 수도로 가는 중요한 길목이었다.
코스⓶는 신라 장보고가 이용한 서해직항로이다. 산둥반도의 적산포와 등주-덕적도-군산-청해진-일본 큐슈 하카타 항로를 이용했다. 고려인들은 벽란도(碧瀾渡)–해주-강령-옹진-장산곶-백령도(혹도; 鵠島)-산동반도를 이용했다. 이때 산둥반도를 출발하면 남풍계열 혹은 동풍계열의 영향을 받아 덕적도-풍도-당성포(마산포)-벽란도로 갔기 때문에 대부도와 마산포 사이를 지나지 않을 수 없었다.
코스⓷은 중국의 연운항과 진포와 회진을 잇는 서해중부사단항로이다. 통일신라 때인 9세기 이후 중국의 관문은 절강성 영파 혹은 양주(揚州)와 금강 하구의 진포(鎭浦), 희안(喜安 현 부안), 회진(會津)으로 통하는 해로였다.
코스⓸는 서해중부사단항로이다 영암 상대포-흑산도-홍의도(紅衣島; 홍도의 옛이름)-가거도(可佳島)-태주(台州) 영파부(寧波府) 정해현(定海縣)으로 있는 바닷길로 중국 남부 무역항과 한반도 및 일본을 연결하려는 필요성에서 개설된 항로였다. 송나라 사신이 중국 절강의 정해-흑산도-군산-안흥-마산포-강화만-예성강 하구의 벽란도에 도착하는 항해 일정도 역시 대부도 주변 바다를 지나야 했다.
역사적으로 국력이 강성한 나라가 대부도 주변을 차지했다. 정복 군주 근초고왕 때는 백제의 땅과 바다였고, 장수왕 때는 고구려의 것이었고, 진흥왕 때는 신라의 영토였다. 마지막에 차지한 신라가 삼국통일의 주인공이 된다. 후삼국 시대에는 국력이 쇠퇴한 신라, 견훤의 후백제, 왕건의 고려 중 대부도 주변을 지배한 해양세력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한다. 조선말인 1894년 풍도해전과 1904년 인천만 해전에서 승리한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게 된다. <다음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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