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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전마(護國戰馬)를 길러낸 국마목장(國馬牧場) 대부도 지명 이야기晴境(청경) 金善喆(김선철)

지금으로부터 631년전 태조 3년(1394년)에 경기도는 좌우도로 나누어져 있었고, 대부도는 경기도 남양부의 경기우도(京畿右道)에 속해 있었다. 이 섬에는 말을 사육하였는데 목장 운영은 매우 중요하였다. 고려 제26대 충선왕 2년(1309년) 모든 목(牧)을 없앰에 따라 남양부(南陽府)로 강등되었다가 조선 제3대 태종 13년(1413년)에 도호부(都護府)로 승격되었다. 그만큼 목장 운영은 국가에서 중요 대사였다.
조선시대 말 가격은 상상을 초월하였다. 팜인사이트 남인식 편집위원(2019.06.04.)에 의하면 574년 전(1451년) “일반 마(馬) 1필의 가격이 쌀 60가마로 1천2백만원을 호가하였다고” 한다. 다른 기록에는 말 한 필에 오승포(五升布)로 대마(大馬)는 상등이 500필, 중등이 450필, 하등이 400필, 중마(中馬)는 상등이 300필, 중등이 250필, 하등이 200필로 거래되었다. 조선시대 마정은 외교면에서 더욱 중시되어 국초부터 세종까지 무려 6만 필의 말을 수출하여 원나라와 명나라까지 그 이름을 떨쳤다고 한다.
그만큼 중요한 말 목장이 대부도에는 언제부터 운영되었을까? 세종실록지리지에 “남양도호부 소속 대부도는 길이 30리요 너비가 15리이니 좌도선군영(左道船軍營)의 밭 100여 결이 있으며, 나라의 말 418필을 놓아먹이는데 염부 4호가 살면서 돌보게 한다고” 기록되어 있어, 그 이전부터 국마목장이 운영되었을 것이다. 18세기 중엽에는 말 568필과 목자가 839명 소속되어 있었고, 조선 제19대 숙종 3년(1667년)에는 제주도의 준마 68필을 대부도 목장에서 번식시키기도 하였다.
이렇게 국가에서 중요시한 말(馬) 관련 지명이 대부도에 많다. 방아머리 선착장 조성으로 없어진 ‘마여(馬㠟),’ 말의 오줌 같아 약이 된다고 손발이 삐었을 때 담갔다는 ‘독족골 약수터,’ 산의 형상이 말 모양 같다 하여 붙여진 ‘말물재와 말머리재’로 현재 대부동행정복지센터 뒷산이다. 부락 앞에 작은 우물이 있는데 목마른 말이 연못에서 갈증을 면했다는 ‘갈마지(渴馬地),’ 국마를 관리하는 목자가 기거한 대부남동 중부흥의 ‘행난곡,’ 대부동동 한지락골 너머의 ‘행낭골(行廊谷),’ 대부북동 두우현에 목부(牧夫)가 많았다는 ‘항난골’이 있다.
흘곶의 말이 지나다닌 큰바위로 만든 ‘말문리,’ 남리 샛티와 막골 사이의 씨종자(種子) 말이 지나다녔다는 ‘종자문,’ 샛티에서 산등성이를 따라 흥성리 작은잘푸리까지의 ‘샛티마성(馬城),’ 남4리의 ‘흘곶마성,’ 중부흥 행낭곡에서 마조금 바닷가까지 목책을 친 ‘마조금 마성, 흥성리의 ‘큰산 둘레 마성’과 말이 굴러떨어졌다는 ‘작은마락골과 큰마락골,’ 큰산 너머 말들이 벌목욕을 하며 놀았다는‘말몰이 갯벌’이 있다.
백마(白馬)가 태어났다는 흘곶과 긴장불이 사이의 ‘두몽,’ 말과 관련된 마을 남3리 행낭곡, 행낭채 앞에 둑을 쌓은 ’행난곡방조제,’ 중부흥과 남3리 사이 말들이 벌목욕을 하며 놀던 ‘마조금벌과 마조금길,’ 갯벌이 깊어 말이 빠져 죽었다는 고랫부리 앞 ‘영장마루,’ 선감도 경기도청소년수련원 골짜기에 있었던 ‘말재비드렁,’ 철종임금 재위 시 신당동부터 당전까지 20여리를 하사받아 오위도총부 소속 군마훈련장(軍馬訓鍊場) ‘우당원’ 등이 있다.
대부도 목장은 조선 전기에 설치되어 조선 중기에는 말과 목자가 상당수에 이르렀으나, 조선 후기에 말이 점차 폐사되어 갑신정변이 일어난 고종 21년(1884년)에 각지로 분양되었고, 분양 과정에서 누락 되었던 58필을 마리당 10냥으로 환산하여 사복시에 납부시킨 후 저물어가는 국운과 함께 호국전마(護國戰馬)의 대부도 목장은 완전히 폐지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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