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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각 선생님이 대부도로 오게 된 사연晴境 김선철

2018년 7월 1960년대 섬마을 선생님 노래 배경지 주변 환경을 조사하던 중 중부흥과 고랫부리의 섬색시 3명이 총각 선생님과 결혼한 것을 알게 되었다. 서강훈 선생님은 수영목의 이춘자 섬색시, 박형원 선생님은 각큰재의 양추자 섬색시, 탁용 선생님은 멍골의 이옥화 섬색시와 결혼한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세 분의 총각 선생님 중 누가 서울에서 왔는지 알아보기 위하여 경로당의 마을 어른과 졸업생, 총각 선생님과 섬색시의 증언을 듣고 정리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세 선생님 중 서강훈 선생님이 서울에서 대부도로 왔다. 이 섬으로 오게 된 사연은 우리나라 근대사의 한 시대 흐름을 보여주는 것 같다.
서강훈 선생님은 1937년 6월 일제 강점기에 서울 종로 행촌동에서 태어났다. 그 어려운 시절에 아버님은 종로에서 큰 한의원(韓醫院)을 운영하여 부유하게 살았다. 그러던 중 1945년 광복 1년 전 가정에 큰 불행이 닥친다. 아버지께서 종로경찰서에서 돌아가신 것이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만주를 자주 왕래하였는데 독립군 자금책이었다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그런 일이 발생하면 그 마을에 더 살 수 없었다. 이사 갈 곳을 수소문하니 서울에서 가까운 섬 대부도, 그중에서 ‘남리(南里)로 가는 것이 좋다고’ 하여 1944년 중부흥 느릿뿌리 마을에 이사(移徙)를 오게 되었고, 이곳 마을 사람의 권유로 많은 토지와 집을 사게 되었다. 어머님은 남편을 잃고 어린아들과 섬으로 이주해서 겪었을 어려움은 너무나 컸을 것이다. 이때 가장 많은 도움을 준 사람이 마을 유지(有志; 부천군당협 부위원장 역임)였던 이춘자 부모님이었다고 합니다.
이때의 서강훈은 7살 어린 나이로 초등학교에 다녀야 했기 때문에 대부초등학교에 몇 년간 다니다가 광복 후 서울 행촌동 집으로 되돌아가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1950년 6.25 사변과 피난 생활을 겪으며 1955년 서울 청운중학교를 졸업한다. 선생님의 집안은 군벌명문가(軍閥名門家)였다. 집에서 외동아들이었기 때문에 어머님은 “보다 안전한 국민학교(國民學校) 선생님이 되는 게 좋으니, 사범학교 진학을 원한다고” 하였다. 그해 서울사범학교는 너무 경쟁률이 높아 그보다 조금 약한 인천사범학교 본과에 입학하게 되었다.
1958년 인천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사 발령이 난다고 하여, 서울 소재 경기도청 별관 문교사회국에 갔더니, 연천군의 학교 발령장을 주어 ‘멀어서 못 가겠다. 사표를 내고 가겠다고’ 하였단다. 장학사가 이력서를 살펴보더니 “대부도에는 가겠냐고” 의사타진(意思打診)을 하였다. 그 섬에는 살던 집과 토지가 있어 그러겠다고 하여, 대부초등학교로 발령받아 근무하게 되었다. 그 후 학생이 증가하여 1960년 6월 대부초등학교 대남분교(大南分校) 개교(開校)로 3학급의 분교장(分校長)으로 부임하였다. 대남분교는 대부도에서 가장 외진 곳이라 희망 교사(敎師)가 없어 분교 근처에 거주하는 서강훈 선생님이 가게 되었고, 1961년 4월에 6학급 인가(認可)로 대남초등학교에 계속 근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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