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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지 마오~꿈에도 그리운 총각 선생님晴境 김선철
‘섬마을 선생님’ 노래의 주인공 서강훈 선생님은 대부도를 떠나서 인천의 언론계에 60년간 몸담아 사회 정의(社會正義)를 위해 노력하셨다. 교직계를 떠나 군 복무와 대학 진학으로 1964년 건국대학교 법정대학을 졸업한 후 대남초등학교에 복직하지 못하고 인천 언론계에 종사하게 된다.
선생님은 1964년 경기도 인천시 경기일보(1980년 군부정권에 의해 언론 통폐합되면서 사라진 경기신문) 기자로 입문한 뒤, 뛰어난 현장 취재력을 인정받아 2년 만에 사회부장으로 승진한다. 그 후 5년 뒤 1971년 편집국 부국장으로 승진하여 언론인으로서 탄탄대로를 걷는다. 그러나 1973년 9월 1일 박정희 군사정권이 단행한 ‘1도 1사’ 언론 통폐합 조치로 ‘연합신문과 경기매일신문이 경기신문에 통폐합’되면서 해직된다. 경기신문(京畿新聞)은 1981년 7월 1일 인천시가 현재의 광역시인 직할시로 승격되면서 1982년 3월 1일자로 제호(題號)를 바꿔 경인일보가 되었다.
선생님은 1973년 언론 통폐합 조치에 굴하지 않고, 인천시민의 목소리를 담아낼 방안으로 해직 언론인들을 모아 교육청 출입 기자 경험을 토대로 전문성 있는 교육신문 발행에 착수하여 1975년 10월 10일 ‘경기교육신보’를 창간한다. 서슬 퍼런 군사정권 하에서 교육 관련 주간지임을 내세워 끊겼던 인천 언론의 공백기를 잊게 한 것이다. 그 후 종합 일간신문 창간을 통해 인천의 목소리를 담아내겠다는 확고한 의지로 교육신보에서 종합 일간지 전환을 시도했지만 군사정권에 의해 번번이 좌절된다.
10여 년간 이어진 인천언론 빙하기는 1987년 6·29 선언으로 언론자율화가 시행되면서 경기교육신보로 쌓은 탄탄한 입지와 시설 그리고 인력을 바탕으로 국내 언론계에서는 찾기 어려운 기자 출신 사주(社主)가 되어 1988년 7월 20일 오늘의 기호일보를 창간한 후, 1998년 3월 20일에는 소년기호일보 발행, 2016년 10월 10일 기호TV를 신설한다. 60년 기자 외길을 걸어온 선생님은 언론이 자본에서 자유로워야 한다는 판단으로 그 흔한 기업의 출자 한 푼 받지 않았다. 창사 49년, 창간 36돌을 앞둔 현재, 기호일보는 불의의 강자 앞에 강하고 약자 앞에 약해질 줄 아는 신문 본래 영역을 저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선생님은 2002년 서울언론인클럽 ‘제18회 향토언론인상’ 2003년 ‘세계자유민주연맹’의 ‘세계 자유장’을 받았다. 서울언론인클럽의 향토언론인상은 이제껏 인천에서 단 3명만 받았을 정도다.
1958년 인천사범학교 졸업 후 대부초등학교 근무, 1960년 6월 대부초등학교 대남분교(大南分校) 분교장, 1961년 4월 대남초등학교에 근무한 ‘섬마을 선생님’ 노래의 ‘총각 선생님 주인공 서강훈 선생님’은 경인지역 60년 언론 외길 큰 족적 남기고 2024년 3월 12일 몇 년간의 투병(鬪病)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향년 87세로 별세하였다. 유족으로는 2남 1녀가 있으며, 섬색시 이춘자 여사를 모시고 인천과 대부도를 오가며 생활하고 있다.
‘섬마을 선생님’ 노래의 총각 선생님 주인공 서강훈 선생님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어려웠던 시기인 2020년 8월 20일 ‘섬마을 선생님 노래비 제막식’에 축하 화환도 보내 주시고 직접 참석하여 60년 전 제자들과 담소(談笑)를 나누던 모습이 아직도 역역(役役)하다. “서울~엘랑 가지를 마오~ 떠나지 마오~” 가사처럼 일제 강점기 말에 사 놓은 바닷가 소나무 숲 언덕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여생(餘生)을 보내셨다. 그 후 선생님은 투병 중이였음에도 끝까지 대부도를 떠나지 못하고, 섬 처녀를 사랑한 대남초등학교 ‘꿈에도 그리운 서강훈 총각 선생님’은 스승의 은혜 하늘같아서 지역과 학교 그리고 이 노래의 영원한 발전을 기원하며 학교 건너편 느릿부리 바닷가 선산(先山)에 영면(永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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