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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대부지도로 본 대부도 지명 이야기(상)晴境(청경) 김선철
필자는 2005년 대남초등학교 교장으로 부임하여 현재까지 20여년을 대부도에 살았고, 10여 년간 자연환경해설사와 문화관광해설사를 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이 섬은 다른 곳보다 역사 관련 이야기가 많고 우리가 이어가야 할 아름다운 지명(地名)이 많음을 알게 되었다. 앞으로 대부도의 지명과 역사 관련 이야기를 40여 회에 걸쳐 기고(寄稿)코자하오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대부도 마을 이야기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2014부터 2016까지 3년간 안산시마을만들기 공모사업으로 “큰섬 대부도 우리마을 스토리텔링 안내서와 대부도 옛이야기 지도” 제작을 위하여 대부도 각 지역유지(地域有志) 38명의 이야기를 듣고, 옹진군지(1989), 안산시사(1999), 대부도향리지(2002)에 기록된 지명 관련 자료를 비교·확인하였다. 여기에 한국해양사, 언론자료 등을 보완하여 기술(記述)하겠습니다.
가장 먼저 대부도 지명의 역사적 고찰을 위하여 157년 전(1872년, 조선 고종 9년)에 제작된 조선 후기 대부지도(大阜地圖, 규10361,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를 참고하여 우리 고장의 지명을 살펴 보고자 한다. 이현군 역사지리학자에 의하면 ‘이 지도는 조선 후기 서해의 주요 섬과 수로, 관청 소속을 기록한 회화식 채색 지도로 오른쪽에 ‘대부도 지계사복 인계남양(大阜島 地系司僕 人系南陽)’이라 적혀 있다. “대부도 땅은 사복에 사람은 남양에 속하고, 사복은 사복시(司僕寺)를 뜻하며, 말과 목장을 관장하는 관청이라 대부도는 나라에서 관리하던 목장이었던 곳으로 지도 가운데 붉은색으로 그려진 관사(官舍)는 목장을 관리하던 관청을 표시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1872년의 대부도 목장은 국가에서 관리하였고, 면적은 사면십리(四面十里), 가구수는 인호사백삼호(人戶四百三戶)라 하여 직경 8km의 큰 섬에 403가구가 살았음을 알 수 있다.
2016년 9월 17일 사청터길 입구에 사는 김인경 전 노인회장으로부터 “감목관(監牧官) 관사(官舍)와 범둣재 옆의 상지목골 주변을 둘러싼 토성(대부진)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해동지도(1782년, 정조 6년)가 반영된 1972년 대부지도에 관사(官舍)는 해좌(亥坐)이고, ‘대부도 감목관 관사는 현재의 대부파출소장 관사 자리에 있었고, 조선말 대부면사무소는 1910년부터 1933년까지 대부진 외곽인 고유지에 있었다’고 한다. 축성주회량위오리(築城周回量爲五里)라 표시되어 있어 대부진이 존재하였음 증명하고 있다.
그리고 상동 활터가 있었는데 대부성당 남서쪽의 사대(射臺)에서 건너편 감나무골 산에 있는 과녁터로 활을 쏘았다는데 광복 후 활쏘기 내기로 논밭을 잃은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옛지도에서 지금의 대부 성당 주변과 감골 일대가 서촌(西村)이고, 성(城)의 남쪽은 염막(鹽幕)으로 만아들 갯골이 있어 외적 방어(防禦)에 유리하였다.
마을 이름을 한자의 뜻대로 풀이하면, 와곡과 뻐꾹산 골짜기는 구석진 마을을 뜻하는 구억리(九憶里)라 하였고, 흥성리는 오가는 배를 살피는 망선리(望仙里), 갈마지는 삼베옷을 짜는 마동(麻洞), 공마루는 두 손을 맞잡는 산마루 공현(拱峴), 신당리(新塘里)는 새로 방죽을 쌓은 마을, 함지박을 닮은 마을 한지촌(寒之村)은 추운 마을, 분지촌(湓之村)은 물이 용솟음치고 물이 만나는 마을, 고유지(古油地)는 땅이 기름진 마을, 당전촌(堂前村)은 신당(神堂)의 앞에 있는 마을, 진두(津頭)는 나루가 있는 마을을 뜻한다. <다음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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